요즘 이야기

1. 생각해보니 한수씨가 일부러 맞춘것도 아닌데 우리의 영국 체류 일정의 딱 절반 되는 시점에 왔다갔다. 그러다보니 보내놓고 나서 새삼 영국생활의 반이 지나갔고 이제 딱 절반이 남았다고 되새기게 된다. 새학기가 시작한지도 벌써 3주인가 지났구나. 2학기는 수업이 절반으로 줄어서 널널할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여;;; 뭐하는지 모르게 여전히 매일매일이 바쁘다;; 요즘 박물관 게이지가 바닥을 쳤는지 박물관에 가고싶어 죽겟는데 갈시간이 없네;; 담주는 조금 여유가 날듯하니 꼭 빅토리아앤앨버트에 가야지. 한수씨가 왔을때 정말 초스피드로 대영박물관을 한시간만에 둘러봤다;; 허긴 그냥 좌우의 전시물들을 슥 흝으며 산책하듯 슬슬 걷는다고 하면 가능하기는 하다. 그치만 난 유물들 하나하나 앞에서 오래 서서 들여다보고 싶단 말이다.

2. 우리집 딸래미는 가끔 아침에 전화만 걸어올뿐 얼굴보지 못한지가 또 며칠째로구나;; 저녁에는 클럽활동이니 뭐니 너무 바빠서 전화할 시간이 안난단다. 내 기준으로는 꼭두새벽인 아침에 통통튀는 목소리로 전화해서 아침잠을 깨워놓고 자기는 버얼써 일어나ㅓ 씻고 아침까지 다 먹었는데 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냐고 구박한다-.- 지난주에는 왕 귀여운 강아지 스케치로 art of the week에 뽑혔고 pen licence를 땄고 이번주에는 드디어 그렇게도 바라던 star student에 뽑혀서 선생님에게 선물도 받았단다. 선물 세개 사달라고 난리가 났다. 하정원의 훌륭한 점은 뭐든지 잘하고 싶어하고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대략 나른하고 맥없는 나와는 달리 하정원은 'enthusiasm'이 넘친다. 강아지 스케치도 정말 열심히 팔빠지도록 그리고 또 그렸고, pen licence도 꼭 따고 싶어서 열심히 했댄다. 자랑스럽다 우리딸 ㅋㅋ 근데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이 엄마는 끝내 한마디를 한다. '근데 수학상장은 언제 또타와?'

3. 요즘 틈나면 유럽여행 카페를 들여다보는게 일인데 고민고민끝에 결국 스위스를 넣기로 했다. 대체 스위스는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스위스 이동루트 설명글을 읽다보면 반쯤 읽었는데 벌써 정신은 안드로메다행;; 봐도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영 부담스러워서 빼려고 했는데 그래도 엄마가 가보고 싶어하시니 마음에 걸렸다. 가기로 결정하고 나니 맘은 편하다. 뭐 죽기야 하겠어;; 유럽여행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야해서 부담스럽다. 빨리 유로스타 예약해야지;; 우선 로마에서 런던으로 돌아오는 이지젯 에약했다. 인당 십오만원 정도니까 사실 제주도 표값정도밖에 안되는건데 작년에 샀던 마드리드 이만원짜리;; 표 탓에 엄청 비싸게 샀다는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능;;;

바르셀로나 추억

남의 여행기 읽는 것이 취미 중 하나다. 대리만족이 되니까. 예전에 동남아 쪽만 줄창 다녔을때는 여행기도 그쪽 것만 읽었는데 요즘은 정보수집 겸 유럽여행기들을 열심히 읽는다. 오늘도 이글루스에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시장 후기가 올라와서 좀 보다가 정원이 생각이 났다. 보케리아 시장은 어느 나라에나 있을법한 재래시장이지만 과일이며 과자 햄 등등 신기한 먹을거리들을 참 알록달록 에쁘게도 장식해 놓아서 사람을 홀렸다. 그중 초콜렛 노점은 별의별 신기한 모양과 색깔의 초코볼들을 가득 쌓아놓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어른인 내가 봐도 환상적인데 하정원이야 당근 환장한다;; 모처럼 인심좋게 이것저것 사고 싶다고 하는대로 봉지에 담아주었다. 하정원은 초코볼 봉지를 들고 넘넘 행복해했다. 그런데 사고는 그다음날-.- 지하철 기다리던 중 하정원이 봉지 밑에 깔린 초코볼을 찾으려고 뒤지다가 그만 봉지를 엎어버린 것이다;;; 수십개의 초코볼들이 지하철 역사 바닥에 촥 흩어져 굴렀고 지하철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우리를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정원은 애절하게 눈물콧물 흘려가며 통곡을;; 나이에 비해 매우 어른스럽게 행동하지만 이럴때는 역시 아직 어린애였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지하철에 올라타서도 하정원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웃기기도 하고 좀 챙피하기도 하고;; 런던처럼 인종구성이 다양한 도시도 아닌데 동양인 여자애가 아침부터 구슬같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울고있으니까 지하철에서 넘 튀는것 같아 민망하다;; 하지만 그외에도 하정원이 지하철에서 내리려다 제대로 낀 사건도 있었지;; 바르셀로나 지하철 문은 우리나라 지하철보다 더 세게 콱 닫히고 다시 열리는 데도 한참 걸리더라;; 먼저 내렸던 나는 당황해서 하정원의 옷자락을 잡아끄는데 그 와중에 지하철 안의 어느 아줌마 나름 도와준답시고 하정원 머리끄댕이를 지하철 안으로 잡아당겼다능;; 아줌마 어쩌라고;; 다행히 문이 다시 열려서 하정원을 이끌고 쪽팔림에 바람처럼 역을 빠져나왔다. 바르셀로나 지하철에서 민망한 짓 많이 했구나;;

오늘도 또 그럭저럭 하루

한달간의 길고도 짧은 방학이 끝나고 하정원이 기숙사로 돌아가고 나는 다시 내 생활로 돌아왔다. 9일까지 오천자짜리 에세이를 내야해서 어제오늘 이틀째 도서관에 박혀서 열공모드. 지난번에 만났던 번역가분이 영국과 브론테에 대한 로망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게 됐지만 로망은 로망으로 끝나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더니;; 공부에 대해 자꾸만 회의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ㄱ석사학위 아니라 박사학위라도 받고나면 확실하게 뭐가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몇년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건가 싶다. 오기전까지만 해도 박사까지 해볼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여기 있다보니 그건 내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해졌다. 너무나 힘든 고행인데 단지 공부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달릴만큼 절실하지가 않다. 인생은 짧고, 열심히 살되 즐겁게 살고싶다.

공부 자체가 좋다고 한다면 몰입하는 순간이 좋아서일 것이다. 어제오늘 이틀간 온종일 모처럼 도서관에서 집중해서 했더니 그래도 뭔가 한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역시 나는 집에서는 집중이 안되는 도서관 체질;;

옥스포드 스트릿에 돈 찾으러 나갔다가 또 잠시 정신줄을 놓고 쇼핑의 바다에서 허우적;;; 이놈의 복싱데이는 꼭 살게 있어서 사는게 아니라 반값이니까 뭐라도 건져야한다는 식으로 사람을 충둥질한다. 이러니까 반값에 팔아도 망하지 않는구나;; 어반아웃피터스에서 시계가 달린 목걸이를 샀는데 맘에 든다. 휘타드에서는 홍차를 샀다. 지난번에 포트넘 앤 메이슨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포기하고 왔는데 누가 초보라면 저렴하면서 가격대비 질 좋은 휘타드에서 시작해 보라고 하기에 사왔다. 저렴한 티백으로 샀는데도 한잔 우려서 마셔보니 우와 이건 차의 신세계로구나;;;; 저렴한 휘타드가 이정도면 포트넘 앤 메이슨의 제대로 된 잎차는 어느정도려나;; 과연 영국은 차의 나라라더니 헛말이 아닌가보다. 나중에 돌아갈때 차를 잔뜩 사갖고 가야겠다.


새해 넷째날

1. 오늘은 골더스그린의 한국마트에 장을 보러갔다. 골더스그린은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동네로 유명한 곳인데 일본인들도 꽤 산다고 한다. 우리집에서 버스로 삼십분 정도 거리이니 별로 멀지 않고 큰 한국마트가 있다고 얘기를 들어서 전부터 한번 가보자고 했지만 쌀이나 김치처럼 덩치 큰 식품들은 에스케이 마트에서 배달을 시키고 자잘한 것은 대충 아스다나 학교에서 가까운 대영박물관 앞 서울마트를 이용하다 보니 갈 기회가 없었다. 오늘 하정원이 학교에 들어가는 날이고 셋째주의 exeat까지 안나오려고 마음먹고 있는 터라 주말에 먹을 간식을 좀 사줘야 할것 같아서 갔다. 이동네에서 산지 넉달이 넘었지만 동네 근처는 별로 돌아다녀 본적도 없다. 혹시나 뭐가 있는데 우리가 놓친걸까도 싶었는데 오늘 83번 버스를 타고 아스다 너머까지 안가본 쪽으로 처음 가보면서 역시 별거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골더스그린은 역근처라 상점들도 많고 북적이는 나름 번화가이면서도 센트럴 런던과는 달리 좀 촌스러운 시골도시 번화가같은 분위기가 나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유대인 동네라더니 검은색 중절모같은 높은 모자에 검은 긴 외투 차림의 아저씨들 모습도 색달랐고 길가다 문득 들여다본 어느 상점 진열장에는 히브리어들이 적힌 장식품들이며 유대교에서 쓰는 촛대 등 신기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아 요즘 카메라가 너무 아쉽다;;;;)

2. 서울프라자에서 장을 보았는데 생각보다 매우 커서 놀랐다. 한국식품 웬만한 것은 없는게 없이 다 있었고 가격도 에스케이마트보다 쌌다. 하정원은 신이 나서 한국 과자들을 이것저것 줏어담았다-.- 장을 보고 나서 근처 한국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런던의 한국음식점들의 공통점은 어딜 가서 뭘 먹어도 늘 내가 이것보다는 훨씬 잘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는 거다;;

3. 정원이를 데리고 올만에 하이위컴으로 향했다. 작년에는 거의 매주 갔으니 참 뻔질나게도 갔던 곳인데 올해는 작년보다는 좀 덜 가게 될듯 싶다. 하정원은 엄마랑 헤어져서 서운하다고 하면서도 친구들을 빨리 만나고 싶다고 들떴다. 오늘이 방학 마지막날인데도 내내 명랑하고 즐거운 모습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5시 반 살짝 넘어 기숙사에 도착했는데 벌써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다 저녁을 먹으러 갔는지 아무도 없다. 학기가 바뀌어서 방도 바뀌엇다. 하정원은 새 방에 들어가서 같은 방을 쓰게 된 아이들 이름표를 확인하면서 투덜댄다. 하자키 싫은데 왜 하필 얘가 내 윗침대야!(하자키는 히로노라는 일본 여자애의 별명이다. 얘는 하정원을 좋아해서 자기 생일파티에도 초대해주었는데 하정원은 얘를 싫어한다;;) 앗 리디아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왔네! 나도 가고싶었는데 먼저 갔다와서 사진을 떡하니 걸어놓다니!!!
짐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헤어졌다. 하정원을 꼭 껴안고 엄마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너는 너무나 멋진 아이라고 말해주었다. 하정원은 나에게 인사를 하고 씩씩하게 뒤도 안 돌아보고;; 식당으로 걸어간다. 지난학기 첫날 하정원을 데려다주었던 때가 떠오른다. 처음에는 좀 무섭다고 가지말고 있어달라더니 조금 있다가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엄마 이제 가라고 했었지. 자기들끼리 어울려 장난치고 노는 아이들을 이층침대에 걸터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정원. 우리 하정원이 내 키만큼 자라면 그때는 얼마나 멋진 여자가 될까.

4. 네이버 유럽여행 카페를 요즘 들락거리고 있는데, 처음에 막막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금방 대충 루트가 나온다. 런던 4-5박-파리 5박-베네치아 2박-피렌체 2박-로마 5박 정도면 무난할것 같다. 런던에서 파리로는 유로스타로 이동하고 파리에서 베네치아로는 이지젯을 이용하고 이탈리아내 이동은 기차로 하면 될것같다. 마음같아선 야간열차 타고 국경을 넘는 경험도 한번쯤은 해보고 싶지만 그건 다음기회에;;; 이정도면 인터레일도 필요없다. 이제 빨리 비행기표를 예약해야지.

5. 한수씨랑 나는 소비패턴이 비슷하다. 이건 무난한 결혼생활을 위해 굉장히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데, 부부가 소비패턴이 다르면 갈등이 생길 소지가 많다. 누구에게나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게 서로 다르면 상대방이 왜 저런데 돈을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고 헛돈 쓰는것 같아 아깝다. 우리는 차나 가구 사는 데에는 좀 인색하면서 여행에는 돈을 쓰는 편이다. 이러니까 엄마는 결혼 십년이 넘었는데 제대로 된 가구 하나 장만 안하고 신혼때 살림 그대로라고 뭐라고 하시지만;;; 눈에 보이고 오래 남는 가구와 눈에도 안보이고 돈쓴 흔적도 안남는 여행 중에서 어느 쪽에 돈을 쓰는게 덜아까울까.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여행갔다오면 남는건 사진과 기억뿐인데 기억은 날이 갈수록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이었던 몇개의 순간만은 흐려진 기억속에 결정처럼 선명하게 남는다. 어차피 죽는 순간에 남는건 그 몇개의 인상적인 순간뿐이 아닐까.
여행카페를 뒤지면서 답글도 최대한 열심히 달아준다. 누가 내 질문에 답해주면 굉장히 고마우니까. 내가 답글을 달아줄수 있는 곳이라야 지금 있는 런던과 바르셀로나 정도겠지만. 겨울방학때 어디로 여행가면 좋을까 물었을때 누군가 바르셀로나를 얘기했다. 나는 거기 뭐가 있는데? 넌 왜 갔는데?라고 좀 어이없다는 투로 물었고 상대방은 멋적게 스페인에서는 거기밖에 안가봤다며 웃었다. 사실 바르셀로나에 대한 내 지식은 올림픽이 열렸던 곳이고 황영조가 마라톤 금메달을 땄던 곳이라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그런데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지금은 바르셀로나라는 단어를 보면 그곳의 눈부신 햇살이 떠오른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거리가 생각난다. 겨우 사흘밖에 머물지 못하고 온 그곳이 그리워진다. 여행은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곳,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곳에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내가 평생 그곳에 다시 가지 못할지라도. 아마도 런던을 떠난 후 나는 오래도록 런던을 그리워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찾는다 해도 그 런던은 내가 30대의 끝자락을 정원이와 함께했던 그 런던은 아니겠지만.  

유럽여행

엄마와 유럽여행을 3월말에 가기로 잠정결정했다. 런던과 파리까지는 괜찮을지 몰라도 7월의 로마는 쌩쌩한 이십대들도 쪄죽는다고 한다. 그리고 3월에 엄마랑 유럽 주요도시를 여유있는 일정으로 편안하게 둘러보고 나면 7월의 여행계획 짜기도 좀더 쉬울것 같다. 그때면 런던 숙소도 그렇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비워두는 편이 좋을듯. 그때는 스위스나 그리스 동유럽 쪽을 돌아보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정 안되면 빨리 돌아올 수도 있을 테니까. 일단 예민하신 울엄마랑 여행계획 짤때는 가장 중요한건 안전빵으로;;; 나도 초행길이니 헤맬수도 있지만 내가 헤매면 엄마가 불안해하실 테니 무조건 안전한게 최고다. 지난번 스페인여행처럼 출발부터 비행기를 놓칠뻔한 스릴넘치는 순간을 경험시켜 드렸다가는 엄마는 기절하실지도;;;; 그래서 이동도 최대한 줄일 생각이다. 런던-파리-이탈리아(로마-베네치아는 꼭 가고 여기에 피렌체를 넣을까말까 생각중) 정도로. 글고 가는곳마다 현지투어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다. 지난번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 투어 해보니 돈이 아깝지 않을만큼 아주 만족스러워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꼭 해야겠다. 엄마랑 정원이랑 발리에 이어 모녀 삼대여행 2탄이로구나.

일정은 최대한 단순하게 잡고 현지투어를 최대한 많이 이용하자고 생각하니 부담이 훨씬 덜하기도 하고 지난번 스페인여행 다녀온 후로 자신감도 좀 붙은것 같다. 스페인갈때 불안감만빵이었는데 어쨌거나 가보니 뭐 지하철 타고다니는 것도 하나도 어렵지 않았고 다닐만 했다. 기차예약이니 인터레일이니 머리에 쥐날것 같지만 그래도 잘할수 있겠지.


새해 둘째날

오늘은 무지 피곤한 하루였다. 새해 결심대로 아침에 늦지 않게(차마 일찍이라고까진 말못함) 일어나 김밥 싸서 아침먹고(원래 계획은 김밥 도시락까지 싸는 거였는데 슬프게도 김이 한장밖에 안남아있었다 ㅠㅠ 서울에서같음 휭하니 집앞 가게 가서 오분만에 사오겠지만 여기서는 ㅠㅠ) 하정원 연산문제집까지 풀리고 사우스켄싱턴 역으로 향했다. 사우스켄싱턴 역에는 사이언스뮤지엄과 자연사박물관 빅토리아앤앨버트뮤지엄 세개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붙어있지만 주구장창 사이언스뮤지엄만 갔었다. 오늘은 자연사박물관으로. 점심먹기 전까지 두개 전시관 구경. 절반정도 본것같다. 지구의 과거를 설명한 전시관에서 화석을 구경하고 화산과 지진등 지각활동에 관한 전시관도 재미있게 보았다. 내가 내내 설명해주어야 해서 약간 힘들었지만. 그러나 하정원이 가장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곳은 암석 전시관 중에서 보석을 전시해놓은 곳이었다;;; 애는 까마귀과인가 왤케 반짝이는걸 좋아할까;;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에 갔다. 생각 외로 굉장히 볼것이 많고 근사한 박물관이었지만 하정원과 나는 이미 많이 지친 상태라 제대로 구경하진 못했다. 담에 다시 오자고(공짜니까) 약속하고 나왔다. 하정원에게 좀 미안한게 되려 내가 새학기 시작이 얼마 안남아 좀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던것 같다. 아이한테 약간 짜증을 냈다. 하정원한테 미안하다고 했더니 아주 쿨하게 자기는 엄마가 작은일로 짜증낸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저녁은 런던에서 알게된 정원이 친구 엄마네 집에 가서 얻어먹었다. 맛있게 저녁 잘 먹고 와인과 맥주 마시며 얘기도 하고 재미있게 저녁시간을 보냈지만 집으로 가려고 나오니 유난히도 서울의 내집과 울신랑이 그립다 ㅠㅠㅠ

2012년 1월 첫날

드디어 기다리지 않아도 당연히 온 2012년 새해 첫날. 어젯밤에는 하정원과 둘이서 티브이로 템즈강에서 벌어진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런던이 볼거리 많다 해도 런던을 대표하는 상징물인 템즈강과 런던아이와 빅벤 빼면 앙꼬빠진 찐빵꼴이지 않을까 싶다. 에펠탑 없는 파리를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런던아이와 빅벤에서 화려하게 불꽃들이 쏟아졌다. 너무 근사해서 정원이랑 입을 벌리고 보면서 우리도 갈걸 그랬나보다 잠시 후회도 했지만 기자가 인터뷰한 어느 구경꾼의 여덟시간 기다렸다는 말과 십분만에 끝나버린 불꽃놀이에 역시 방에서 티브이로 편하게 보는게 최고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오늘은 신년기념 퍼레이드가 있는 날. 퍼레이드가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출발점인 그린파크 역으로 가서 구경하자고 맘먹었지만 새해 첫날부터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양가 아들들이 새해 첫날부터 약간의 분란-.-을 일으킨 통에 아침부터 양가 어머님들과 길고긴 통화를 하느라고 시간을 다 까먹었다.

하여간 새해 첫날이니까 달랑 떡국과 김치뿐인 썰렁한 아침상이나마 정원이랑 떡국을 끓여먹고 나섰다. 어제 불꽃놀이는 인파가 엄청나다고 해서 겁나서 안나갔었는데 퍼레이드는 워낙 행렬이 길기도 하고 행진하는 거리도 길고 시간도 길어서 인파가 분산되니까 생각보다 구경할만 했다. 그러나 기대보다 약간 허접하다는 느낌;; 제법 괜찮은 그룹도 있었지만 어떤 그룹은 진짜 퍼레이드 나오고 싶었나보다 싶은 생각이 들만큼 그냥 대충 집에 있는거 뒤져서 줏어입고 나온 듯한 느낌. 마칭밴드들이 볼만했는데 얘네들도 워낙 많다보니 나중엔 다 그게 그거인듯 싶다. 그래도 날씨가 춥지 않아서(런던 겨울날씨의 유일한 장점) 한시간 반 정도를 구경했다. 볼만큼 봤다 싶어 발길을 돌리니 비가 쏟아진다. 런던은 겨울이 우기라더니 요 며칠째 비다. 안그래도 칙칙한 날씨에 비까지 오면 정말 최악의 겨울날씨가 어떤건지 제대로 경험해볼수 있다-.-

근처 레스터스퀘어의 차이나타운으로 갔지만 하정원이 오늘따라 중국음식은 땡기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한국음식점 포함하여 런던의 모든 음식점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탓인지 그럭저럭 즐겁게 식사를 했다. 최소한 한국음식은 입에는 맞으니까. 하정원이 순두부찌개를 좋아한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동안 나는 정원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안해줬고 정원이는 엄마가 만들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해달라는 말으ㅡㄹ 안했던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 시간도 애매하고 뭘할까 잠시 고민하다 웨스트필드에 가서 약간 구경하고 귀가. 나는 프렌치커넥션에서 여름 블라우스를 하나 샀고 하정원은 또 사랑하는 자라-.-에서 티셔츠와 쫄바지를 샀다. 내눈에는 촌스럽기 짝이 없구만;; 이것으로 복싱데이 쇼핑은 끝. 이것저것 사기는 했지만 간이 작은 녀자인지라 큰거 하나 시원하게 지르는건 역시 안된다능;;;

이제 하정원과 함께 지낼 날이 이틀밖엔 안 남았다. 몹시 아쉽지만 영국 와서 초기에 하정원이 주말이면 학교 돌아가기 싫다고 괴로워하던 생각하면 지금은 잘 적응해서 나와 헤어지는 것도 힘들어하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엄마랑 헤어지는게 슬프지만 학교가서 친구들 만나는건 또 기대되고 좋단다. 그래도 하정원과 한달동안 재미있게 잘 지낸것 같다. 정원이가 워낙 착하고 어른스러워져서 나도 어쩌다 아이의 실수에 화를 내려다가도 넘어가게 된다. 방학 전에는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어찌 정원이랑 한달을 보낼꼬 걱정했지만 지나고 보니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지 좁은 집에서 둘이 지내는 것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매일매일 하정원이랑 어디 갈까 궁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한달이 뭐했는지 모르게 빨리 지나가 버렸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박물관은 내셔널갤러리랑 사이언스박물관밖에 안갔네;;; 내일은 자연사박물관에 가야지.

이런저런 이야기

1. 오늘 저녁에 간만에 빨래를 했다. 이 플랏의 불편한 점 한가지는 방에 세탁기가 없어서 공용 코인 세탁기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게 한번 쓰는데 우리돈으로 삼천원이다. 빨래하고 나면 건조기도 써야 한다. 그러니까 빨래 한번 하면 5-6천원이 나간다는 얘기다. 이돈이 왤케 아까운지. 버틸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하정원이 양말이 없다 낼 입을 속옷이 없다 난리를 쳐야 빨래를 한다. 그런데 오늘은 간만에 한데다 이불커버까지 빨았더니 너무 많았나보다. 건조기를 한번 돌렸는데 안말라서 눈물을 머금고 또 돌렸는데도 빨래가 거의 안말랐다;; 오늘따라 피곤해서 기분 안좋은데 이모냥이니 심기가 몹시 불편해지면서 이 망할 영국생활에 다시한번 fuckyou 소리가 나온다. 건조기가 감당못할만큼 한꺼번에 많이 넣고 돌린 내가 바본거지 뭐-.- 방에는 빨래 널곳도 없다. 할수없이 대충 몇개는 방에다가 걸고 나머지는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ㅠㅠ 건조기에 또 넣었다. 빨래하는 비용이 드라이클리닝 비만큼 든다. 한국 있을땐 유일하게 좋아하는 집안일이 빨래라서 매일 세탁기 돌렸는데. 이게 웬 궁상인지 ㅠ 이렇게 적어놓고 보면 굉장히 불쌍해 보이는데 애 학비로 학기당 천만원이 넘는 돈을 내고 요 며칠 복싱데이 세일이라고 매일 나가서 옷들을 지르고 왔는데;; 근데 세탁비는 정말 아까워 죽겠는걸 어쩌냐고;; 나는 절대 알뜰한 주부가 아닌데 가끔 사소한데 집착하는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런던에서 젤 아까운게 집세나 세탁비처럼 한국에 있었으면 안써도 될 돈을 써야할 때다. 먹고사는 생활비나 옷값 같은 거야 한국 있었어도 썼을테니까 괜찮다. 런던에서 집세 세탁비 다음으로 아까운게 외식비다. 진짜 거지같은 음식 먹고 한국의 두배 세배되는 금액 적힌 빌 받아들면 또다시 욕나온다;;;; 오죽하면 한국에서는 외식 그렇게 사랑하고 거의 외식으로 살던 내가 정원이랑 외출할때면 아침겸 점심 든든히 먹고 나가서 저녁 전에 들어와서 집에서 먹거나 아님 아예 도시락을 싸갖고 나갈까;; 어제오늘은 정말 런던에서 복싱데이 세일기간에는 돈이 있어도 밥을 사먹을수가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음식점을 대여섯군데를 돌아다녀봐도 자리가 없다. 쌀쌀한 날씨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데 길에서 샌드위치를 씹고있는 진짜 없어보이는 몰골들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불평하지 말고 집떠나면 원래 개고생이지 하고 참아야 하는데 주변인들 말을 들어봐도 정말 런던생활은 험난하고 고달프다. 하긴 얘기 들어보면 가장 큰 괴로움은 대다수 유학생들이 그렇듯 플랏에 방 하나를 세들어 살아야 할때 집주인 혹은 다른 세입자들과의 여러가지 소소한 갈등이다. 그런얘기 듣다보면 콧구멍만하나마 독립 플랏을 갖고 사는 내 처지가 훨씬 낫다는건 알겠지만 그래도 난 원래 불평불만 투덜이 스머프라고-.-;;

2. 해로즈 백화점에 오늘 또 갔지만 별렀던 쇼핑은 못했다. 해로즈 카드를 만들수 있는데 이게 당일은 사용을 못하고 만든 다음날부터 사용가능하다. 이 카드를 만들고 나니 세일품목들도 다 10%씩 추가세일을 해준다는데 오늘 살수가 없는것이다;; 영국애들 섬나라 근성이 있어서 쪼잔하다더니 세일만은 화끈하구나;;

3. 이런거 가지고 단순무식하게 판단하면 안될거 같지만 셀프리지 백화점에 27일 갔을땐 진짜 중국인이 반이상이었다. 런던에 중국인들이 많긴 한데 그렇게 많은 중국인들을 한장소에서 본건 처음이라서 놀랐다. 근데 어제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는 중국인 거의 못봤다;; 동양인 자체가 거의 없었다. 뭔가 약간 씁쓸하기도.

사이언스 뮤지엄

오늘은 해로즈 백화점 잠깐 찍고(...) 사이언스 뮤지엄으로 직행. 런던온지 넉달만에 영국최고의 럭셔리 백화점이라는 해로즈에 처음 가봤는데 그동네도 꽤 맘에 들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브랜드 샵들이 줄줄이 있어서 쇼핑하기 좋을듯. 그러나 하정원을 친구와 놀게 해주는게 늘 제일 중요한일-.-

사이언스 뮤지엄을 오늘로 네번째 갔다;; 그 옆의 빅토리아앤앨버트 뮤지엄은 아직도 구경도 못해봤는데ㅠㅠ 하정원은 사이언스 뮤지엄 광팬이라 갈때마다 문닫을 때까지 놀다가 나오지만 근사한 전시물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여러가지 체험을 할수있도록 꾸며놓은 인터랙티브 공간이 신나는 놀이터일뿐. 물론 그런 놀이를 통해 과학적 원리를 쉽고 재미있게 익히라는 박물관의 배려 따위도 알바아니다;;;

오늘 만난 분은 나와 여러모로 비슷한 처지. 번역가이고 하정원과 동갑내기 딸과 단둘이 와서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하고있다. 둘이 한참 런던생활의 고달픔을 토로하며 런던은 멋진 도시지만 살인적인 물가와 아이를 전적으로 케어해야 하는 어려움 등등 생활상의 문제들 때문에 역시 한국의 내집이 최고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약간은 슬프지만 우리는 이제 돌도 씹어먹는 이십대가 아니라는 사실;; 생활에서 느끼는 여러가지 소소한 불편과 곤란함들이 런던이라는 멋진 도시에서의 생활의 매력을 깎아먹는다.

그래도 런던생활도 어느새 4개월이 지나가고 이제 반년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참 짧기는 너무 짧구나 싶으면서 아쉬움이 몰려온다. 내년의 남은 런던생활을 어떡하면 좀더 후회없이 보낼수 있을까 고민중이다. 유럽여행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게 젤 큰 문제네;; 하정원 봄방학이 무려 4주나 되니 그때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아니면 걍 원래 계획대ㅇ로 7월에 가야할지. 결정장애에 귀차니즘까지 중병 수준인 나로서는 계획 짜기가 너무 힘들다.

복싱데이

정확히 영국의 복싱데이는 어제 12월 26일이다. 그러나 어제 지하철이 파업한 관계로 걍 집에 있었다. 나가고는 싶었지만 집에 못돌아올까봐 겁나서;;; 우리 플랏은 지하철로는 교통 환상이지만 버스로는;;; 글쎄 여기서 버스를 타고 센트럴에 나가려는 시도는 해본적도 없다;; 이사할때 픽업기사가 킹스크로스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두시간 걸렸다고 했다. 지하철로는 이십분인데;;

이틀을 내내 좁은 집안에 있었더니 하정원이 난리가 났다-.- 어제는 침대위에서 뛰고 구르고 춤추고 기운을 주체를 못해서 날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 더있으면 난동을 부릴 기세다.

복싱데이라고 해도 뭐 그리 크게 살게 있을까나 하고 열한시쯤 본드스트릿으로 나갔는데 오마이갓 도로에 차가 다니기 힘들만큼 엄청난 인파다;;;; 유명백화점들 앞에는 복싱데이 전날 새벽부터 줄을 서고 장사진을 이룬다던데 하루 지난 뒤여서인지 그정도는 아니었다. 근데 명품쪽은 이미 쓸만한건 다 건져간듯 세일품목들은 대개 세일을 해준대도 그닥 사고싶지 않은 것들뿐이다.

점심때 만난 영국에서 오래 산 친구는 복싱데이 따위 귀찮고 복잡해서 안나간단다. 오 런더너들은 복싱데이 따위는 쿨하게 무시해 주시는구나;; 그러나 런더너가 아닌 나와 하정원은 별거없다는 친구 말에 동의하면서도 막상 셀프리지 백화점 가니까 정신줄을 놓지 않을수가 없었다;; 눈 가는 명품들은 세일 안한다 해도 괜찮은 옷 브랜드들이 죄다 오십프로씩 세일을 한다. 그래도 이성을 잃지 않고 막스마라에서 원피스 하나랑 꼼뜨와데꼬뜨니에에서 니트 상의 한개만 질렀다. 근데 띠어리에서 본 자켓도 너무 이쁘고 DKNY 블라우스도 탐난다 ㅠㅠ 우리나라 백화점의 사악한 가격을 생각하면 이건 사는게 남는거야라는 생각이;; 바디샵도 반액세일중이라 샤워젤이랑 바디스크럽 바디버터를 긁어왔다;; 맘같아선 몇년치를 사서 한국에 들고가고 싶을지경;; 본드스트릿의 거의 모든 샵이 다 반액세일 광고로 도배를 하고 길거리에 넘쳐나는 사람들마다 큼직한 쇼핑백을 들고 메고 다닌다. 뭐랄까 좀 무섭도록 사람의 소유욕을 부채질한다는 생각이 든다. 분위기에 휩쓸려 딱히 사고싶지 않았거나 필요한 것이 없었어도 안사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것이다. 아휴 너무 피곤한데 내일 또 해로즈 백화점에서 약속이 있다;; 아무래도 이번주는 쇼핑주간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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